<조선희의 예술가의 집을 찾아서⑨>조각가 임춘배의 선흘 작업실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집은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그릇일 터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숨을 받고 많은 인연들 속에서 자라고 나이를 먹어가고 무수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아온 집. 하물며 예술가의 집이랴.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예술가의 집이 지닌 숙명이 아닐는지. 그래서인지 예술가의 집은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예술가와 그가 매번 엄청난 산통(産痛) 끝에 세상에 내놓는 작품들과 꼭 닮아있다. 


 바다와 오름과 돌담이 하나로 어우러진 제주 곳곳에는 예술가의 집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들여다보고 싶어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궁금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갈 수 없는 예술가의 집들을 순례하는 여정은 아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숨결과 더불어 늘 깨어있는 예술혼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될 듯도 하다.      <편집자 주>

▲ 멀리서 바라본 쌍둥이 건물 전경
군더더기 하나 없는 노출 콘크리트 마감의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두 채. 선흘리 선인분교 옆에 독특한 외관의 '건물'이 서 있다. 집이라 하지 않고 굳이 '건물'이라고 쓰는 이유는 얼핏 봐서는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아서이다. 아무리 봐도 그 집은 지지고 볶고 복닥거리는 사람살이에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표현을 바꿔보자면 그 어떤 복잡하고 수선스러운 사람도 그 집에서라면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단정하게 살게 될 것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품이 그런 것처럼 집도 결국은 가장 단순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이라는 게 내부는 사람이 사는 공간이지만 외부는 형태로 표현되는 하나의 물체이니까요."

▲ 마당에서 바라본 살림채와 작업실
집 입구에 마두상(馬頭象)이 서 있는 까닭에 동네에서 '말대가리 집'으로 통하는 이 집의 주인이자 설계자인 조각가 임춘배 교수(제주교육대학)의 의도가 그러했다니 100% 효과를 거둔 것이나 다름없겠다. 외관이 멋스럽게 장식된 집은 처음에는 눈에 딱 들어왔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식상해지기 쉽지만 단순한 집은 처음에는 별로였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단순하고 진득한 멋이 배어나온다는 것이 임교수의 부연설명이다.

강한 눈·비·바람·안개 다 안고 사는 마을
선흘의 랜드마크...'돌챙이(石手) 교수 집'

▲ 집 입구 마두상 앞에 선 임춘배 교수
임교수가 이곳에 부지를 마련한 것은 20년 전의 일. 제주의 동부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제주시에 진입해도 대부분 동쪽에 거처를 마련하는 특유의 귀소본능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역시 동김녕리 출신. 제주를 떠나 타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마친 뒤 대학교수 임용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85년 제주로 귀향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간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사람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가고, 도피하고 싶은 마음뿐일 때 같은 그룹 활동을 하던 선배가 땅을 보러 다닌다기에 따라왔다가 사게 된 땅이었다. 당시 북제주군 소유지라 등기이전은 안 되고 경작권만 살 수 있었던 땅인데도 결코 가격은 헐하지 않았다. 모아둔 돈은 없었지만 '20년쯤 뒤 내 작업실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땅이다'라는 논리 하나로 모친을 보름 동안 설득했다.

지금의 작업실 자리에 원룸 형태의 작업실을 겸한 조립식 주택을 앉힌 것이 90년대 중반, 제주교육대학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오고 싶을 때마다 이곳을 찾아 며칠씩 칩거했다. 작업을 하기도 했고, 그냥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 살림집과 쌍둥이 형태의 작업실 전경
"이곳의 자연이 정말 좋습니다. 이 동네는 비, 눈, 바람, 안개 이 모든 것이 강하거든요. 사람의 성격은 일차적으로 유전인자의 영향으로 형성되겠지만 태어난 곳의 자연환경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척박한 땅 김녕이 고향이라선지 순탄하고 만만한 것에는 애초 매력을 느낄 수 없어요. 오로지 이곳의  강인한 자연조건에 끌린 거지요."

작업실을 오가며 마을을 둘러싼 10여개의 오름이 계절마다, 시시각각 보여주는 변화에 푹 젖어들길 3년. 여름날 푹푹 꽂히는 칼날같은 비, 시도 때도 없이 앞을 분간할 수 없도록 자욱해지는 안개,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바람, 다른 곳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쌓이는 눈...남들이 최악의 조건으로 꼽을 만한 것들이 그에게는 고스란히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5년 전 살림집을 먼저 짓고 지난해 겨울, 살림집과 꼭 닮은 형태로 지금의 작업실과 서재를 겸한 공간을 마련했다. 살림집 뒤편으로 펼쳐진 마당은 그의 작품 전시공간이기도 해서 다양한 인체상들이 넓은 잔디밭을 빙 둘러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봐도 조각가의 집임을 알려주는 표지인 셈이다. 

▲ 단순하나 강인함이 느껴지는 살림채 모습

▲ 도서관의 목록함을 응용한 작업도구 수납장
추지 않는 실험정신...다양한 소재 넘나들어
"작품과 현실 속 완벽 추구의 장인정신 필요"

오는 새해 1월8일부터 예정되어 있는 개인전 준비를 위해 학교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이곳 작업실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상태. 하지만 임교수의 실제 작업실 모습은 대장간 혹은 목공소 혹은 석재공장과 흡사하다. 돌, 나무, 철, 스테인리스스틸, 청동 등을 소재에 따라 다루는 공구를 죄다 따로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오늘 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수업이 없는 오전에 화북공단에 들러 필요한 자재, 예컨대 철판이나 볼트, 너트 등을 사온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지인들과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다시 학교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기계로 철판을 자르거나 용접을 한다. 우아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물감을 풀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쇠를 녹이고 돌을 깎고 용접을 해야 작품이 완성된다.

작업은 한없이 거칠지만 그 끝에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완벽한 조형미의 작품이 탄생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기보다는 '匠人'이라고 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예술가뿐 아니라 기술자에게도 장인정신이야말로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집을 지을 때의 일이다. 소위 타일 전문 기술자라는 사람이 벽의 수평도 잡지 않고 얼렁뚱땅 붙이는 것을 보고 당장 때려치우라며 자신의 공구로 순식간에 다 뜯어내버렸다. 교수라고 해서 순전히 책상물림인 줄 알았다가 큰 코 다친 기술자들에게서 얻은 별명이 '돌챙이(石手) 교수'.

▲ 마당 한켠에 놓인 임교수의 작품 성모상.
그만큼 그는 완벽을 추구한다. 비트는 묘미도 있겠으나 그 어긋남을 용납하지 않는다. 살림집이나 작업공간을 직사각 형태로 지은 것도 공간을 비틀지 않고 형태미와 효율성을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소재에만 집착하지도 않는다. 소재에 한계가 느껴지거나 작업이 지루해질 때는 이내 소재를 바꾼다. 초창기 줄곧 제주석으로 작업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제주석만을 다루는 조각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돌에서 나무로, 청동으로, 철로, 스테인리스스틸로 다양한 소재의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제주조각공원은 물론 목포조각공원, 서울 문예진흥원 등 전국적으로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이처럼 충만한 장인기질과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의 산물이다. 특히 그의 직장이기도 한 제주교육대학의 정문은 그의 작품이다. 제주정낭과 방에라는 제주 고유의 문화유산을 교육이념으로 승화시킨필생의 대형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와 안개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기에 그 어디에서나 오래토록 나이를 자연과 함께 나이를 먹어갈 그의 작품들이다.

                                                                           <조선희 / 프리랜서>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