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집>15 금속공예가 권오균

▲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에 자리잡은 작업실 마당에서 장업중인 권오균 작가.
설마 그런 곳에 작업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예술가의 작업실이라고는 해도...'금속공예가 권오균 작업실'이라는 팻말을 따라 차 한대 겨우 다닐 만한 산길을 따라 오르는 길, 작가가 누차 강조했던 "군산에 바짝 붙어 쭉 오시면 됩니다"라는 말만 귀에 맴돌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오르라는 말인가. 만에 하나 잘못 접어든 길이라면 어디에서 차를 돌려야 하나 걱정이 될 즈음 다시 예의 팻말이 나타난다. 반갑다. 혹여 오다가 지레 포기할까봐 작가는 군산에 바짝 붙어 쭉 따라 올라오라고 강조했던 것 같다.

▲ 야외 작업실이자 야외갤러리인 '청동기' 앞마당.
정말 작업실은 군산에 바짝 붙어 있었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보면 군산 정상, 고개를 아래로 떨구면 안덕 계곡, 고개를 반듯이 들어 정면을 보면 망망한 바다,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면 유채꽃 흐드러진 밭 조각 하나가 칼로 썰어놓은 케이크 한 조각처럼 먹음직스럽다. 예술가의 작업실은 모름지기 이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발아래를 굽어보니 할아버지를 찾아 알프스에 오른 소녀 하이디나 된 듯한 착각도 든다. 어떻게 이런 곳에 오도카니 집 한 채가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원래 이곳은 어느 스님이 공부를 하시던 자그마한 암자였는데 언제부턴가 내내 비어있었답니다. 제가 두어 달 전부터 들어와 기거할 수 있을 만큼만 고쳐서 작업실로 삼게 되었지요."
방 한 칸짜리 버려진 폐가가 솜씨 좋은 예술가를 만나 묵은 때를 벗었으니  집과 땅은 임자가 따로 있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 청동으로 재해석된 제주의 각지불.
경상북도 안동이 고향인 권오균 작가가 제주도에, 그것도 군산 자락 안덕계곡에 자리 잡게 된 사연이 퍽이나 궁금하다.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서울 인사동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제주에 첫발을 디딘 것은 제주 돌문화공원의 백운철 원장과의 인연으로 돌문화공원 개원 준비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돌문화공원 내의 동(銅)작품은 모두 그의 솜씨이다. 돌문화공원이 개원되고 막상 서울로 되돌아가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다시는 그 막막한 콘크리트 도시에 갇혀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문대 할망의 기운이 온몸에 느껴지는 제주도에 정착해야겠다는 열망이 앞섰다. 그렇게 시작한 제주살이. 처음에는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예전에 서울에서 작업했던 디자인이며 선(線)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주에서 사계절을 지내보니 세상의 아름다운 선(線)은 바로 제주 자연에 오롯이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한겨울 바람 한가운데 버티고 선 겨울나무의 줄기는 그가 세상에서 처음 만난, 지독히 아름다운 선(線)이었다. 그래, 바로 이것을 금속으로 표현하자, 마음을 먹고 작업실을 구하러 다니던 중에 만난 가시리 정석비행장 도로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세상에 이리도 아름다운 길이 있나 싶어 앞뒤 재지 않고 가시리에 공간을 빌려 임시 작업실을 차렸다. 그때가 4년 전. 그러다가 이곳 대평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이 올해 초의 일이다. 작업실 이름도 참으로 맞춤하게 '청동기'.

"녹슨 금속과 갈옷, 송이석의 색깔은 절묘한 제주의 색깔 그대로입니다. 서로를 배척하지도 않고 튀지도 않으면서 잘 어우러지는 제주만의 빛깔이지요. 계곡물이 흘러내리면서 둥글둥글 천연의 무늬로 깎인 바위를 보면 기가 막혀요. 거기에 낙엽이라도 한 장 떨어져 있으면 너무도 아름다운 제주의 거울 같아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 세계가 쌍을 이루어 불을 돋우고 있는 청동 각지불.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금속으로 표현하되 그것이 철저하게 생활 속에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믿는 권 작가. 그런 믿음을 실현하는데 이곳만큼 적당한 작업실은 없을 듯 하다. 작업실이 인가와 붙어 있을 경우 금속판을 자르고, 불로 굽고, 붙이고, 구부리고, 두드리고, 휘고, 용접하는 작업의 특성상 소음으로 인한 민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야 낮밤을 가릴 필요도, 사람들에 부대낄 이유도 없어 그저 작업에만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銅)의 가장 큰 매력은 다루기 쉽다는 것이지요. 잘 늘어나고 잘 휘어져서 의도하는 대로 표현을 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금이나 은과는 달리 재료 가격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어 그것도 마음에 들고요. 때로는 흙처럼 때로는 종이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 표현할 수 있으니 이만한 매력이 없지요."
다루기 쉽다고 해서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프로 작가의 손에서나 가능한 일. 웬만한 금속공예 전공자들이 대형 조형물에 도전하기보다는 액세서리와 같은 소품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육체노동량과 노동 강도 탓이란다.

제주에서의 작업으로 내면세계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는 권 작가의 작품은 여러 곳에서 제주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남원읍 방문자센터를 비롯해 방림원, 분재예술원, 서귀포 주공 6단지 아파트 등지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금속 새나 천진하게 몸뚱이를 드러내고 있는 금속 개구리가 모두 작가가 탄생시킨 아름다운 생명체들이다.

"주로 새(鳥)를 세우고 싶습니다. 설문대 할망의 오백 아들들의 영혼을 새로 기리고 싶어서입니다. 주로 제주에서의 작품 모티브를 새에서 찾고 있는 까닭입니다. 한라산이나 오름 등을 생활소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실은 아직까지 한라산에 올라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제주 밑바닥, 땅바닥도 다 보지 못했는데 감히 한라산에 올라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아서이지요."
잠 잘 틈도 없이 행복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작가는 올 가을 서귀포 다비치·리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질 예정이다. 금속공예 소외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제주에서 금속이 어떻게 우리 생활과 만나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단다. 더 나아가 가로등 하나에도 그 지역의 정서와 개성을 담아 표현할 수 있었으면 싶다는 바람도 털어놓는다.
"제주 돌문화공원 작업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제주의 물줄기서부터 제주의 바람길까지 고려해서 작품을 배치하는 백운철 원장께 배운 것들이 제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들기를 바랍니다."

아담한 공간이지만 작업실도 야외 갤러리로 꾸밀 계획이다. 날마다 군산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외치는 '야호' 소리를 들으면서 얻은 아이디어로 머잖아 지붕에 '야호' 외치는 개구리들을 살게 할 작정이다. 작업실 바로 뒤로 이어지는 절벽엔 달팽이 식구들을 살게 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청동종을 매달아 바람이 머물다 가게 할 생각이다.
"저 너른 바다가 제 스케치북이고 이 기막힌 절벽이 제 갤러리인데 작업이 안 될 까닭이 없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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