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예술가의 집 20>피아니스트 우상임
음악 공유를 통한 소통...정기적 '작은 음악회' 결실

▲ 피아노 곁에 앉은 우상임 피아니스트.
자작나무는 춥고 배고팠던 러시아 유학시절의 향수
제주 시내 주택가 한복판. 다소 번잡한 동네의 한 식당 지하로 통하는 계단의 철문에 <자작나무 숲>이라는 알림막이 한 장 붙어 있다.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도 아니고 백두산 가는 길목도 아닌, 한반도 끄트머리 섬 제주 시내 한복판에 자작나무 숲이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자작나무 숲 입구.
그래서일까, 오히려 극히 새롭고 자극적이고 낯선 뭔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조심스레 계단을 짚어 내려가니 아담한 공간이다. 결코 넓다고 할 수 없는 공간 앞쪽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소박한 객석이 자리 잡고 있다. 입구 쪽으로는 갈천 방석을 씌운 통나무 의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어 자유롭게 대화도 나누고 음악도 듣는 공간으로 쓰이는 듯하다.

이곳이 바로 피아니스트 우상임 씨가 피아노 연주를 연습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와 그의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한 달에 두 번 작은 음악회를 여는 문화공간이다. 말하자면 우 씨의 개인 스튜디오이면서 소극장을 겸하고 있는 복합적인 문화공간인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작나무 숲>일까? 그 까닭을 알자면 그의 프로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제주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가 1996년 훌쩍 유학을 떠난 곳이 러시아 모스크바. 그가 어딘가에 썼던 유학 당시의 에피소드를 옮겨보면 이렇다.

'지금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그때만 해도 진열되어 있는 빵 중에서 내가 먹고 싶은 빵의 금액을 카운터에 가서 말하고 돈을 내면, 가격을 쓴 종이를 주고, 그것을 빵 코너에 가서 보여주면 빵을 주었다.

▲ 모형 피아노 모금함.
그러니 내 차례가 오는 동안 계속 빵의 가격을 속으로 연습하는 수밖에…. 가격은 또 왜 그리 간단하지 않은지. 2,897루블, 3,726루블 등. 그리고 왜 그리 발음은 어려운지."드베 띄시치 보심 솟 제비노스타 씸 루블(2,897루블)." 이것이 내 차례가 오기까지 속으로 연습하던 러시아어였다.

결국 내 어눌한 발음에 "뭐라고요?"라고 카운터에 앉은 아가씨가 되물을 게 뻔한 상황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돌아선다. 빵을 사지 못했다...처음 빵을 못 사고 돌아오던 날, 나는 그 돈으로 학교 옆 공연장에서 음악회 티켓을 샀다. 음악회 티켓을 사는 것은 빵을 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가격을 말하기도 간단했다. 티켓가격은 3,000루블이었다.

나는 2,897(드베 띄시치 보심 솟 제비노스타 씸)루블의 빵을 포기하고, 3,000(뜨리 띠시취)루블의 음악회를 택했다. 단지 발음이 더 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날 이후 빵을 살 용기가 없는 날에는 습관처럼 음악회 티켓을 샀다....' 

그렇게 배고프고 추운 대륙 러시아에서 서럽게 시작한 유학생활 동안 우 씨가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마련한 연습실에 유학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 그리움의 대상을  이름으로 붙이게 된 것.

음악의 공유를 통한 소통...정기적 '작은 음악회'로 결실 
 

▲ 자작나무 숲 내부.
"2000년 4년간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련한 곳이니까 벌써 10년째네요. 장시간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아파트나 주택에서는 이웃에게 피해를 줄 염려가 있어서 지하공간을 택한 거지요. 임대료도 싸고...처음 한 두 해는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며 혼자 연습하는 작업실이었는데 차츰 제자들의 솜씨발표회를 겸한 향상음악회를 열다 보니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작은 음악회로 이어지게 된 거지요."

우 씨가 피아니스트라는 직업 외에 문화공간 <자작나무 숲>의 '숲지기'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사연이다.

두 번째 주에 열리는 작은 음악회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 네 번째 주는 어른을 위한 음악회로 구성되어 있다. 발렌타인 데이의 '달콤한' 음악회, 악기를 다루는 가족들의 '붕어빵' 음악회, 장애인 가족을 위한 '음악온도 36.5℃' 음악회 등등 각각의 주제에 안성맞춤인 제목이 붙어있다.

평소 음악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소시민들을 끌어당기는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중년 남성들을 위한 '옛사랑' 음악회는 부부동반 금지라는 재미있고도 색다른 주문이 더해져 음악회의 문턱을 낮추는 구실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저 혼자서 낑낑대며 음악회 주제를 정하고 구성을 했는데 지금은 10명의 제자들이 브레인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작곡, 악기 연주 등 저마다 전공 분야가 있어서 서로 아이디어를 짜내고 출연자를 섭외하고 연습을 하면서 음악회를 만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솜씨를 부모들께 보여드리고 사랑과 격려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첫 무대를 마련해주자 싶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입소문과 귀동냥을 통해 일부러 찾아와 단골 관객이 되신 분들이 많아요."

▲ 자작나무 숲 내부.
자칭 <자작나무 숲> 후원회원들도 생겨나서 음악회가 열리면 간식을 도맡아 챙겨오는 사람도 적지 않고 십시일반 후원금으로 도와주는 사람도 생겼다. 특히 올해부터는 중앙 무대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똑 닮은 모형 피아노 모금함이 등장해 '자작나무 숲' 마니아들의 마음이 한층 바빠졌다. 이름하여 피아노 기증 프로젝트.

우 씨와 제자들은 <자작나무 숲>까지 직접 올 수 없는 장애인이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시설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 때마다 '피아노가 없는 곳에 피아노를 마련해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었단다. 늘 피아노를 싣고 가서 연주를 마치고 다시 싣고 오는 길이면 그런 아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아예 올해부터 조금씩 기금을 모아 중고 피아노라도 사서 기증하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시골 마을에 피아노가 생긴다면 한 번 열릴 음악회가 두 번 열릴 수도 있고, 피아노를 가까이 한 어린 장애인들 가운데 피아니스트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꼭 필요한 곳에 피아노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아이들 가르치랴, 작은 음악회 열랴, 올해로 3회째 이어오고 있는 환경 음악회('나무의 꿈', 5월 23일 오후 6시 한라수목원) 열랴, 지난해부터는 제주대 문화광장 운영팀 이끌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우 씨지만 해마다 자신의 연주회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6년 째 진행되고 있는 우 씨 연주회의 타이틀은 한결같다.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유학파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우 씨는 연주회와 <자작나무 숲>을 통해 끊임없이 러시아 음악의 향기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셈이다.

"특별한 지원이 없어 자비로 행사를 치러야 할 때는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가 떠안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음악회만 해도 이제 그만둘 수도 돌아설 수도 없잖아요. 이럴 때마다 춥고 고독했지만 열정적이었던 유학시절을 떠올리면서 힘을 얻곤 합니다. 차츰 형편이 나아지면 지하공간을 벗어나 좀 더 쾌적한 공간에서 음악회를 열고도 싶고요."

지금 40대 이후 세대라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을, 이웃 담장 너머 들려오던 황홀한 피아노 소리처럼 동네 <자작나무 숲>에서 들려오던 작은 음악회의 아름다운 선율을 기억할 이가 적지 않으리라.  <조선희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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