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예술가의 집-21>판화가 홍진숙의 아라동 판화공방
한갓진 동네작업실에서 잉태되는 회화성 짙은 판화

▲ 작업실에서의 홍진숙 작가.
미술 전시회의 타이틀을 보면 대강이긴 하지만 작가가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이나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보인다. 어쩌면 작가가 살아온 날들이 보이기도 하고 어쩌다가 간혹은 작가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보일 때도 없지 않다.

▲ 판화공방 외관.
그래서 작가가 1년에 한번 혹은 몇 년에 한번 세상을 향해 펼치는 전시회의 타이틀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작품 낱낱의 제목은 전체적인 타이틀보다 난해한 경우가 훨씬 많다. 보고 들음이 그다지 넓거나 깊지 못한 축들이 잔뜩 주눅 들게 되는 경우가 바로 이 때이다.

▲ 판화공방 외관.
제목과 작품을 퍼즐 조각 맞추듯이 번갈아 짚어보며 도대체 이 작품 어느 구석에서 저 제목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고민스럽기 짝이 없다. <무제(無題)>라거나 <존재(存在)>라거나 <모티브>라는 제목은 그나마 낫다. 나름대로 무제 혹은 존재 혹은 모티브로 이해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형이상학적 제목은 아무래도 버겁다.

▲ 판화를 찍어내는 작업대.
그런 의미에서, 올 봄 제주 문예회관과 중문 갤러리 찰나에서 열린 판화가 홍진숙 씨의 일곱 번 째 개인전은 이런 긴장감을 무장 해제시켜 놓아도 좋을 만했다. '비 그치면...' '꽃비 내리는 다랑쉬' '하도리 잔물결' '용수리 저녁길' '귀향-쇠기러기 잠들다' 등등의 제목이 붙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번 개인전 타이틀은 <마음의 고향>.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뻔했던 판화 작품들을 거기에 붙여진 푸근한 제목들 덕분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시회에 부쳐 홍 씨의 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으니 사람의 느낌은 밑바닥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작업실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프레스기 내부.
"...홍진숙은 그 시선이 과거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푸른곰팡이처럼 바스러지는 녹색과, 까마득한 시간 저편에서 생겨난 화산송이를 닮은 황갈색은 그 색감 자체로도 이미 과거에 속한다.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 색채들은 스러지는 것들,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들의 마지막 시간을 품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판화에 드러나는 녹색과 황갈색은 안으로 흐르는 시간을 품은 '오래된' 색이다. 제주 출신이라 말하지 않아도 제주가 보이고 제주를 그린 것이라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제주의 속살이 보인다. 판화인데도 그림 같다. 섬세한 붓질마저 느껴져서 눈을 부비며 다시 보면 분명 판화이다. 이쯤이면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작품을 낳기까지 고독하고 치열한 시간을 보냈을 그의 작업실에 대한 호기심이 인다.

제주시 아라동의 한갓진 동네에 자리한 작업실을 찾았다. 소담한 잔디밭이 작업실과 찻길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홍 판화공방. 낮게 깔린 분홍 사철 채송화와 샛노란 창포꽃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일반 주택처럼 생겼으나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면 곧바로 작업실이 나오는 좀 특이한 구조의 2층 조립식 건물이다.

좀 높이 앉힌 집 뒤는 넓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잘 가꿔진 귤밭이다. 그 너머로 도심의 건물들이 살짝 보이고 그 뒤로는 바다가 아련하다.

"4년째 지내고 있는 작업실입니다. 그전에는 일도동에 공간을 임대해 공방을 꾸렸는데 이곳에 맞춤한 땅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조립식 건물을 지을 수 있었어요. 60㎡ 정도 되는 아담한 공간이라 작업하고 어린이들이나 일반인 대상으로 판화교실을 열기에는 적당합니다."

규모는 작아도 앞에는 잔디마당이요, 뒤에는 귤밭도 있고 바다도 보이니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고 말을 건네니 귤밭은 다른 사람 소유라고 손사래를 친다. 누구 소유가 무에 중요할 것인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안을 수만 있으면 그게 임자인 것을...앞뒷문을 열고 작업실에 앉으니 초여름 해질녘의 차분하고도 약간 서늘한 바람 기운이 느껴진다.

대로변에서 약간만 벗어났을 뿐인데도 정적이 감돈다. 아마 이런 작업실이 있기에 고향처럼 푸근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겠다 싶다.

▲ 작업실 앞에 선 작가.
"판화가 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일단 엄청 무거운 프레스기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임대공간인 경우 좀 제약조건이 되지요. 여기에 판화를 찍어내는 공간이나 방학이면 여는 판화교실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은 되어야 하니까요. 좀 비좁은 느낌도 있지만 2층엔 갤러리도 꾸며 놓았어요. 보통 땐 제 작품들을 걸어놓지만 전시 공간이 필요한 젊은 작가들에게 제공하기도 하고 워크샵 공간으로 쓰거나 예술관련 영화를 상영하기도 합니다. 소박하게나마 공간이 되는 대로 갤러리와 판화공방을 통해 작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 그림 작업을 해오던 홍 씨가 판화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991년. 결혼한 뒤 집에서 홀로 작업을 하다보니 사람들과 교류하고 공감하고 싶다는 갈증에서 찾아간 곳이 판화가 고길천 선생의 공방이었다. 그림 작업보다 훨씬 강도 있는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한데다 과정도 번거롭지만 판의 질감을 살려 의외의 우연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혼 씨가 꼽는 판화의 매력이자 미덕이다. 

"그림도 그렇긴 하지만 찍어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한 미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참 재미있어요. 저는 주로 제거에 의한 목판소멸법으로 작업을 하는데 독특한 회화성을 강조할 수 있는 게 묘미이지요. 목판소멸법은 색채별로 10번 이상을 찍어내야 하기 때문에 한 작품 당 서너 장 밖에 찍을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색채별로 목판을 찍어내는 다색목판이나 채색한 목판으로 찍어내는 목판채색은 보다 다량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는 용이하지만 홍 씨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짙은 회화성은 드러내고자 하는 색채를 하나씩 하나씩 찍기와 제거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목판소멸법에서 비롯된 특질인 셈이다. 그러나 기법만으로 이뤄지는 예술은 없는 법. 기법이 그릇이라면 주제는 거기에 담긴 음식일 터.

일곱 번의 개인전 가운데 두 번의 주제가 제주 신화였으니 2005년 <섬, 그 안의 신화>, 2008년 <내 안의 신화-서귀> 가 그것이다. 오랜 시간 제주 무속에 관한 공부를 해온 홍 씨가 제주 곳곳의 신당과 풍부한 신화를 판화로 표현해내고 싶었던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 2층 홍 갤러리로 통하는 외부 계단 사이로 엿보이는 설치미술작품
 
'아방국은 홍토나라, 어멍국은 고산국입네다'에서 시작하여 '만남의 인연', '어긋난 사랑', '고난의 길', '갈등', '용서와 화해', '땅의 조정', '본향'으로 이어지는 서귀신화 연작은 하나의 작품에 신화적 스토리와 신화적 상징을 구성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련의 작품으로 신화의 스토리를 고스란히 재현해내고 있다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어긋난 사랑'에서 보여주는 섬뜩할 만큼 강렬한 색채나 '내안의 신화-달의 바다Ⅰ'에 드러나는 몽환적인 이미지는 오히려 판화이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제주 신화를 그림으로도 표현하고 싶어요. 지속적으로 공부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지요. 신화적 캐릭터를 찾아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나기도 하고 제주의 정신문화를 담아낸다는 의미가 있는 작업이어서 신화작업은 제게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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