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집>22 서예가 현병찬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집은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그릇일 터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숨을 받고 많은 인연들 속에서 자라고 나이를 먹어가고 무수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아온 집. 하물며 예술가의 집이랴.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예술가의 집이 지닌 숙명이 아닐는지.
그래서인지 예술가의 집은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예술가와 그가 매번 엄청난 산통(産痛) 끝에 세상에 내놓는 작품들과 꼭 닮아있다.
바다와 오름과 돌담이 하나로 어우러진 제주 곳곳에는 예술가의  집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들여다보고 싶어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궁금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갈 수 없는 예술가의 집들을 순례하는 여정은 아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숨결과 더불어 늘 깨어있는 예술혼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될 듯도 하다.    <편집자>

저지리 예술인촌 터줏대감...44년 교직 퇴임 후 둥지 틀어
제주 말씨 담은 한글 서예 외길...올 가을 첫 개인전 서울서

▲ 1층 상설 갤러리 자신의 작품 앞에 선 한들 서예가 현병찬 선생.
허름한 동네에 있는 듯 없는 듯 처박힌 집도 예술가의 작업실이라면 그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하물며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문화예술인마을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인 마을. 입구에만 들어서도 대기에선 벌써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 10만㎡ 면적의 이 마을에 작업공간이나 전시공간을 두고 있는 문화예술인은 현재 모두 21명. 이 가운데서도 이 마을에 가장 먼저 입주한 작가가 바로 한글서예가 한곬 현병찬 선생이다. 현대미술관 뒤쪽에 자리한 선생의 작업실 택호는 <먹글이 있는 집>.
 
다른 예술가의 집처럼 화려하지도 넓지도 않지만 아담한 잔디마당과 토끼며 닭 식구들이 사는 ‘동물농장’까지 갖추었으니 실속으로 따지자면 겉만 한껏 멋 부린 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1층은 선생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 공간과 제자들의 작업 공간이다. 2층은 선생의 거처이자 새벽 두세 시를 훌쩍 넘겨서까지 글을 쓰는 공간.
 
“미치지(狂)않으면 미칠 수(及) 없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저만 해도 이 산 속에 전 재산을 꼴깍 털어 넣고, 남들 다 하는 골프 같은 취미생활은 아예 즐길 줄도 모르는데다 자발적인 독수공방을 하면서도 행복하기만 하니 정말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어쨌거나 저는 스스로 매우 행복합니다.”

▲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에 있는 작업실 <먹글이 있는 집> 전경.
선생이 문화예술인 마을에 입주한 때가 2003년, 44년간 줄곧 몸담아 온 교직을 퇴임한 직후였다. 반백 년에 가까운 교직생활이었으니 자신에게 휴가라도 줄 법한데 선생은 곧바로 제주시내 집을 떠나와 이곳에 똬리를 틀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작업실이랍시고 버젓하게 차리긴 했는데 글을 쓸 시간이 없더라는 것. 아이들을 가르치고 온갖 잡무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고 국전 출품기간이라도 되면 밤잠을 자지 않고 글을 쓰다 이튿날 출근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막상 그 일들로부터 해방되었는데도 글 쓸 시간이 없다니, 그 시절의 치열함이 그립더란다. 그러나 독학으로 배우다시피 한 한글 서예이다 보니 스승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누군가 선생을 필요로 하면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제주사범학교 시절 소암선생께 사사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자 서예를 배우다가 2학년부터 한글을 가르쳐주셨는데 졸업을 하고 나니 한글 서예를 사사할 만한 스승이 안 계시니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질 않는 겁니다. 뜻대로 되질 않으니 붓글씨에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거의 십년을 방황했지요. 그러다가 70년대부터 학생지도에 매진하면서 저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솟았는지 당시 제주 북초등학교 350명 학생을 혼자 지도해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가르친다는 것은 또 다른 배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 아래서 배우는 사람보다 더 연구하고 정진해야 할 사람이 독학자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 예술의 전당 개관 때 회원전에 출품했는데 현지에 가서 다른 작품들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해보니 지금까지 헛일을 했구나 싶은 좌절감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더란다. 뼛속 깊이 각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쓰고 또 쓰고 다시 쓰기를 되풀이했다.     
 

▲ 올 가을 개인전에 선보일 작품들.
“한글 서예는 상형문자인 한자 서예보다 변화가 적습니다. 한글도 상형화 노력을 해보지만 결실이 두드러지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의 정신이나 얼을 나타내자면 한글이어야 하기 때문에 한글 서예를 놓을 수 없어요. 게다가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제주 말씨는 애오라지 한글이어야 가능합니다.”

재미있기로  치면 한자 서예가 한글 서예를 앞서지만 겨우 토씨만 한글로 쓰는 한자 서예로는 우리의 정신도, 우리의 문화도 담을 수 없어 한글 서예를 고집한다는 선생이다. 보통 한글 서예체는 궁중 서법에 따른 궁체, 학자와 선비들의 편지글과 같은 서간체,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고딕체인 판본체, 일반 백성들이 제멋대로 쓰는 민체 등이 있다. 서간체는 개성이 넘치고 판본체는 자기 취향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매력이고 민체는 자연스러운 것이 멋이다. 선생의 대표적인 서체는 파도체. 판본체에 힘을 실어 바다 물결(파도)을 가미하여 연구한 서체이다. 선생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적절한 힘이 실리면서 만들어내는 균형미와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남성미가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이 파도체 덕분이다.

▲ 기획전시전과 회원전을 통해 서예가들의 소통공간이 되고 있는 갤러리 내부 모습.
이와 함께 선생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한글을 형상화해서 표현한 선생만의 서체이다. 산이나 길이라고 썼는데 그것은 단순히 산이나 길이라는 글자가 아니라 그 글자 자체가 하나의 산과 길 모양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을 미처 읽기도 전에 그 글이 산이나 길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체에서만 선생의 개성과 내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시롱하다(고소하다), 베지근하다(입맛 당기다), ?박하다(가득차다), 심벡하다(선의로 경쟁하다)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탐라국 고유 언어를 맛깔스럽게 되살리는 일 역시 선생의 제주언어에 대한 애정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글 서예 외길 오십년 만에 올 가을 처음으로 마련하는 첫 개인전 역시 제주 말씨와 민요, 제주를 배경으로 한 시 등 제주관련 작품들로 거의 채워질 예정이다. 제주를 알리는 전시회가 될 예정인 개인전 초입에 내걸리게 될 작품은 <제주 사름>과 <제주마씸>.

“저처럼 간세한 사람은 올 가을 첫 개인전이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겁니다. 200점 정도 선뵈는데 거의 최근 작품들로 구성을 할 계획입니다. 시골에 사니 마음이 자유로워 글도 자유로워진 느낌이지만 서예는 필력이 떨어지는 70이 고비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하향길이겠다 싶은 생각도 드는 요즘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한글 서예가 한자 서예보다 미적 감각이 덜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진짜 우리 정신을 나타내는 한글 서예에 더욱 매진할 겁니다.”

‘누가 불르지 말암시민’ 글쓰기에만 완전히 파묻힐 수 있을 것이라는 선생의 하루는 아침 8시에 일어나 새벽 두세 시까지 작업하는 것으로 마감된다. 하루에 두 차례 풀을 뜯어다 토끼에게 먹이는 일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 글쓰기가 워낙 체력 소모가 큰 작업이라 하루 종일 글만 쓸 때에는 다섯 끼니를 먹어도 배가 고플 정도라는 선생의 열정과 마음은 청년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넓은 예술인 마을을 오롯이 혼자 지키는 밤도 드물지 않다는 선생에게 외롭거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내비치니 되돌아오는 명쾌한 단 한마디.
“미쳐서 하는 일이니 힘들 것도 없어요.”     

<프리랜서 / 조선희>

#본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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