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예술가의집 26> 도예가 김영수
작은 휴식공간이 화산토 빚는 큰공간으로
현무암.송이석 등으로 흑요 빚어, '덤벙그릇' 개발

제주시에서 평화로로 빠져나가는 길목, 제주 관광대학 즈음에 이르면 오른편으로 <제주요(濟洲窯)>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보인다. 도예가 김영수 선생의 작업실을 겸한 갤러리이자 '화산토 도자기 문화 박물관'이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라도 되는 듯 갤러리 마당에 서면 제주 시내와 바다가 발밑이다. 맑은 날은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엷게 운무가 낀 날도 풍광은 덜하지 않다. 바로 아래 차량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도심도 손에 잡힐 듯 하지만 마치 먼 거리를 떠나온 듯 속이 탁 트인다. 실없게도, 역시나 예술가의 작업실은 지대가 낮은 곳보다는 높은 곳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휴관일을 택해 <제주요>를 찾은 날, 김 선생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다. 선생의 앞에 놓인 작품들이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청자빛에 가까우나 딱히 청자라고 하기 어려운 오묘한 빛깔의 작품들엔 놀랍게도 꽃이 피어있다. 그것도 투명한 유리꽃이...자기(磁器)와 유리의 만남이런가?

"이것을 개발하는 데에만 1년이 꼬박 걸렸습니다. 도예 인생 50년 중 가장 어렵고 힘든 때를 보낸 것 같습니다.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요. 화산토 로 그릇을 만들어 문양대로 디자인해서 투각한 다음 백자토를 푼 물에 처리해서 유약을 입혀 굽는 방식인데 이 투명한 꽃잎은 유약이 구멍을 막으면서 유리처럼 표현된 것이지요.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고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름하여 '제주 화산토 덤벙 투명 그릇'. 덤벙이란 백토를 푼 물에 그릇을 '덤벙' 담궈 백토를 씌웠다 해서 이름 붙여진 도자 기법의 하나. 제주 화산토로는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는 통념해 도전한 지 8년 만에 화산토로 빚은 제주 흑자를 세상에 선보인 선생이다. 그러나 제주 흑자는 그 매력에 흠뻑 빠진 마니아층이 있는 반면 대중적인 이해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제주 흑자로 변신시킬 수는 없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지난 해 떠났던 일본 여행길에서 280년 된 레스토랑에 들렀을 때 우연히 눈에 띈 것이 잔잔한 구멍이 뚫린 물컵이었다. 이것을 확대해서 제주 그릇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실험과 도전은 수십 번 수백 번 시행착오로 이어졌다.

단순히 잔잔한 구멍만 뚫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으로 확대 표현하자니 구멍은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그릇의 강도에 영향을 미치고 온도 또한 예민해져 구상한 만큼의 작품이 나오질 않았던 것.

"몇 백 번 실수 끝에 나온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나이가 들어선지 만족이 없습니다. 보는 건 커지고 섬세해지는데 표현은 그를 따르지 못하니 늘 부족하고 아쉽습니다. 이 덤벙 투명그릇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 디자인 보완 작업이 필요합니다."

전라도 여수에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에 경기도로 이주, 화분공장에서 일하던 부친을 따라 '흙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이래로 운명처럼, 필연처럼 '그릇쟁이'가 된 그가 제주에 뿌리를 내린 것은 1998년. 세상의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나이, 열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황실 지정 가마인 '대설요'에서 일본 황실의 명품창작 기법을 전수받았다.

1975년 경기 광주에 경안요를 열고 일본과 한국을 드나들며 작품 활동을 펼쳐오던 그는 1998년, 조선왕실 도자기 제조지였던 광주의 옛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광주 왕실 도자기 축제'의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광주에서 작업해 온 세월만도 40여년. 하지만 그는 광주를 떠나 제주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72년쯤 석 달 정도 서귀포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제주를 내 마음 속에 담아두었습니다. 언젠가는 제주에 아주 작은 공방을 하나 내리라는 꿈을 품게 된 거지요. 이 부지는 97년도에 마련한 겁니다. 애초에는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이 아니었어요. 심신이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면서 열정과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길 바랐는데 남들은 지나치는 것들이 내 눈에는 자꾸 보이니 판이 커질 수밖에요."

동물적 감각'으로 흙을 꿰뚫어보는 그의 혜안을 비껴갈 수 없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제주의 화산토였다. 화산 폭발시 가장 먼저 분출된 송이석과 화산 현무암, 광령리와 감산리에서 채취한 백토 등 다섯 가지 화산토를 태토 삼아 제주 분청과 제주 청자, 제주 요변 도자기를 탄생시킴으로써 '제주 흙으로 과연 도자기가 될까?'라는 논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선생이 화산토 도자기를 개발하면서 보유하게 된 특허만도 화산 현무암과 송이석을 원료로 한 검은색과 적갈색 송이 유약, 검은색 화산토와 송이토 소지개발 등 8~9가지에 이른다.

"화산토 도자기는 어느 육지 도자기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게르마늄이나 원적외선 등 특수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것은 뜨거운 대로, 차가운 것은 차가운 대로 온도를 유지하는 성질도 탁월합니다. 게다가 육지 옹기에 비해 유해미생물증식이 억제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제주 화산토에 제대로 '필'이 꽂힌 선생은 7년 걸려 300여 평의 공간에 갤러리와 작업실과 살림집을 두루 갖춘 지금의 건물을 완성, 지난 2006년 문을 열었다. 살고, 만들고, 전시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 공간에서 해낼 수 있는 복합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제주요>의 가장 유명한 명물은 야외공간에 놓인 거대한 맷돌. 높이가 4미터에 이르는 맷돌은 태토의 주재료가 되는 현무암과 송이석을 빻는 분쇄기로 선생이 고안해낸 것이라고. 이에 못지않게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맷돌 앞에 자리한 도자기 무덤이다. 

단 한 점의 오차나 흠결을 용납할 수 없는 예술가에게 가차 없이 버림받은 도자기 주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평범한 문외한이나 아마추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준열한 자기검열을 보여주는 산증거이기도 하다.

"실은 정착하기까지 어려움이 컸습니다. 제주에 온 것이 후회되기도 했어요.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게 한 화산토의 발견이나 청정한 자연환경 등의 조건은 훌륭했지만 역시 유통이나 물류가 어려웠습니다. 이곳에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었거든요. 더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육지 출입이 잦아야 하고요. 도자기 문화는 빈약하고...이제는 이런 단점을 장점과 강점으로 변화시킨다면 보람이 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제주 흑자의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피땀 흘려 개발한 것이 '제주 화산토 덤벙 투명 그릇'이고 보면 제주가 선생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선생은 제주가 더없이 감사하단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겼으니 다른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더라면 아무런 궁리나 연구 없이 그냥 저물었을 나이이지만 이곳이 제주였고, 화산토가 있었기에 새로운 실험을 하고 도전을 할 수 있었으니 어찌 제주가 감사하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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