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예술가의 집 29> 시인 한기팔

▲ 한기팔 시인.
편견이란 참 어리석고도 무서운 것이다. 『서귀포』의 시인이니 당연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업실이 있으려니 했다. 분명 어디께의 무슨 아파트라고 들었으면서도 섶섬이 한 눈에 내려다 뵐만한 아파트만 찾자고 엉뚱한 곳을 헤매느라 그만 약속 시간에서 몇 분이 지나버렸다. 결국 다시 손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물론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증거(!)까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橘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西歸浦·2, 全文>
 

대학·군대기간 빼고는 고향 떠난 적 없는 ‘보목리 사람’

한기팔 시인의 집은 비록 파도소리가 들릴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문밖을 나서 조금만 걷다보면 섶섬이 건너다보이는 위치였다. 감귤 과수원이 딸린 마당 넓은 집의 큰 살림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몇 권의 책과 이젤과 수십 개의 붓만 챙겨 단출한 아파트살이를 시작한 지 6년 째. 처음엔 답답하고 무료해서 정이 붙질 않던 아파트살이도 해를 더하고 보니 적응이 되었다고 시인은 웃는다. 비록 흙을 밟는 시간은 줄었지만 아담한 아파트의 거실과 서재가 온통 시와 그림의 창작 공간인 셈이다.

“내 나이가 일흔하고도 둘인데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때와 군 입대 기간을 빼고는 보목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이곳에 일가들이 다들 모여 사는 데다 종손이어서 아예 떠나 살 생각을 해보지 못했지요. 이곳으로 옮기기 전까지 내가 태어난 생가에서 줄곧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보목과 섶섬과 서귀포 바다가 곧 내 시의 모태이지요.”

단순히 떠나지 않고 붙박이로 산다고 해서 다 고향을 노래하는 시인이 될 수는 없는 일. 서귀포에서 중학을 마치고 제주상고에 진학했으나 1년 정도 다녔을 무렵 어머니가 그리워 견딜 수 없어 서귀포로 내려와 서귀농고에 진학했다 하니 보목은 곧 어머니의 품이요, 어머니는 곧 보목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사는 맛 나게 사는 거 있지/ 이 나라의 남끝동/ 甫木里 사람들은 그걸 안다......다만 눈으로만 살아가는/ 이웃들끼리/ 먼 바다의 불빛,/ 하늘 한 쪽의 푸른 빛 키우며/ 키우며 마음에 燈을 켜고/ 살아가는 사람들......(<'甫木里 사람들'일부>)이라는 시는 그냥 에멜무지로 씌어진 시가 아닐 테다.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등단, 詩歷 60년...회화성 강한 시 세계 추구

문학 책보다야 의식주가 더 화급했던 시절, 열 서너 살 소년은 운명처럼  바이런과 푸쉬킨과 괴테를 만나게 된다. 솔동산 아래, 풀빵을 구워 팔던 작은 책방에서였다. 세계적 문호들의 포켓용 시집은 감수성 예민한 바닷가 태생의 소년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시를 읽고 또 읽고 떠오르는 시상을 주체할 수 없어 메모하고 시로 다듬는 일이 반복되었다. 제법 내공을 쌓아가던 소년의 시가 제주대학 학생문예에 당선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 소년의 시를 눈여겨 본 이가 바로 시인 박목월(朴木月)이었다. 당시 사랑의 도피처로 제주를 택한 木月이 제주대에 출강하고 있었던 것. 당대 최고 시인의 주목을 받게 된 문학 소년의 목표는 木月 선생이 가르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 입학하고 보니 시는 木月 선생을 비롯해서 미당(未堂)서정주·김구용 시인 들이, 소설은  김동리, 최정희, 염상섭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문학의 세례를 아낌없이 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대학 생활이었지요. 木月 선생은 물론이고 未堂 선생의 영향도 컸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습관적이다시피 未堂 선생 댁을 드나들며 공부를 했어요. 세월이 좀 흐른 뒤 1974년 제주에 초청 강연 차 내려온 木月 선생이 서귀포에서 묵었는데 그동안의 시작 노트를 보여 달라는 거예요. 내 노트를 보시더니 빨리 ‘심상(心象)’으로 보내라 하시더군요.”

‘심상(心象)’은 1973년 木月 선생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시 전문지. 한 시인은 1975년 1월 木月 선생 추천으로 ‘심상(心象)’을 통해 <꽃>, <원경>, <황혼>의 세 편 시로 등단하게 된다. 군대 문제 등으로 등단은 좀 늦은 편이었지만 문학 소년기까지 포함하자면 한 시인의 시력(詩歷)은 60년을 바라보는 셈이다. 그렇다고 다작(多作)시인은 아니다. 1978년 첫 시집 『서귀포』를 펴낸 이래로 지난 해 일곱 번째 시집 『별의 방목 』을 상재하였으니 오히려 과작(寡作)시인 축에 든다 할 것이다.

몇 권의 시집과 캔버스가 함께 하는 아파트 작업실...시화집 내고파

“한 달에 한 편 꼴로 시를 쓰니까 5년쯤 걸려서 50~60편을 모아 책으로 묶습니다. 보통 새벽 두세 시에 일어나 해가 밝을 때까지 작업을 하는데, 한 달 내내 머리 속에서 굴려 시 한 편 씁니다. 시상(이미지)에 적중하는 시 한 편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등단한 지 햇수로 35년째, 오년 마다 한 권씩, 일곱 권의 시집을 냈으니  참으로 정직한 계산법이요, 치열한 시작(詩作)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실 한 시인은 시인이라는 이름 말고도 그만큼이나 더 알려진 이름이 있으니 화가가 그것이다. 오랜 시간 교직에 머물다 정년퇴임한 한 시인이 으레 국어 교사였으려니 생각한다면, 앞서도 말했거니와, 그것은 어리석고도 무서운 편견의 하나가 될 터이다. 한 시인은 미술 교사였다. 그림에 입문한 것 역시 중학 시절. 역사의 풍랑, 제주 4·3을 겪은 시기였기 때문이었을까. 정방폭포 절벽에 맺힌 보리수나무의 붉은 열매를 따노라면 전날 총살당한 시신이 걸려 있곤 했던 그 시절, 당시에는 그런 경험들이 훗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도록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리라곤 미처 생각 못했으나 소년은 그때 시를 읽고 그림을 그렸다. 대학에서 시를 전공했으나 고향에 돌아와 직장을 가져야 할 순간, 미술과로 교사 검정고시를 치렀다고 했다. 

“문학과 미술, 특히 시와 그림은 밀접한 관계이지요. 감각적이고 회화성이 강한 시를 주로 쓰는데 이는 미술과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요. 시에 그림을 곁들인 시화(詩畵)를 즐기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이제 시화집을 한 권 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달라는 대로 줘버리는 통에 그림이나 시화를 모아놓질 못했는데,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시집 한 권쯤은 시화집으로 엮고 싶은 바람입니다.”
 
한 시인의 대표작 <西歸浦·1>을 읽노라면 인생의 팔 할을 시와 그림으로 살아 온 老시인이 그림처럼 떠오를 게다.

버릴 것은
죄다 버리고 왔다.

물굽이를 건너며
바다에 두고 왔다
여기는
솔동산 入口
알 것만 같은 사람들이 바람결처럼
무심히 지나간다.

故鄕이 아니어도
한 번은
오고 싶던 故鄕

눈을 감으면
記憶에도 없는 한 사나이가
노을처럼 서서
바다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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