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돌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1959년도에 지어진 일자형 돌집이다. 귀농을 앞두고 맨처음 이 집을 보러 온 남편은 너무도 맑고 유쾌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너무도 편안한 느낌이 들어. 지붕은 낮고 벽은 두꺼워 제주의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겠어” 이집을 사기로 한 얼마 뒤 바다를 건너와 이 집과 조우한 나는 남편의 안목에 아김없는 찬사를 보냈다. 결혼하고 13년동안 일곱 번 이사를 했지만 단 한번도 자기 손으로 계약서를 써 본 일이 없는 남편이 치른 첫 거사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결단이었다. 우리는 석달정도 걸려 집내부를 좀더 편리하고 우리 생활 양식에 맞게 고치는 공사를 벌였지만 돌집 자체에는 어떠한 변화도 가하지 않았다. 슬레이트 지붕도 그대로 두었고 돌집의 한켠에 자리한 돗통시도 손대지 않았다. 원래 있던 아치 형태의 굴묵 자리를 없애지 말라는 우리의 당부를 무시하고 시멘트로 막아버린 공사업자는 두고두고 우리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일자형 돌집이다보니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방을 크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나 우리가 갖고 싶어했던 널찍한 마루겸 거실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나 절대적으로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 빼고는 그 어느 호화아파트나 별장식 전원주택 못지 않게 만족스러운 게 우리의 돌집이다.우리가 과천과 이곳을 오가면서 집을 고칠때 그리고 우리가 이사온뒤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을때 이웃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이렇게 판을 크게 벌일 바에야 아예 새 집을 짓지 그랬느냐고, 서울 사람들이 이렇게 비좁고 낡은 집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사실 우리 동네에도 새 집을 지어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이 집을 보나 저 집을 보나 교복입은 아이들처럼 똑같이 생겼다. 집 앞쪽에 몇 개의 기둥을 세우고 정사각형으로 낸 방에는 어느 집이나 비슷한 구조와 모양의 창문을 내고 희한하게도 커튼마저 비슷한 모양으로 걸려있다. 어떻게 보면 1970년대쯤 내가 살았던 육지에서 한바탕 유행이었던 슬라브식 집들이다. 게다가 이런 새 집들은 대부분 마당 한쪽에전시용 잔디밭을 꾸민 다음 콘크리트로 마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았던 도시에서처럼 발에 흙 묻힐 일이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흙마당을 고집했고 올해 잔디가 퍼지기 전까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 네 식구는 모두 장화를 신고 돌아다녔다. 살아보니 돌집의 매력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천장이 낮고 벽이 두꺼우니 외풍이 들지 않는다. 여름 땡볕에도 집안으로 들어서면 오히려 착 가라앉은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돌집에 잇대어 블록 벽돌로 만든 주방 벽에는 장마철 내내 곰팡이가 피지만 돌집 벽에는 우리가 이사올 때와 마찬가지로 곰팡이 한점 핀 곳이 없다. 제주의 옛 사람들이 왜 야트막한 지붕의 돌집을 짓고 살았는지를 알고도 남겠다. 바람과 비가 많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빛나는 슬기가 아니고 무엇이랴.최근 나를 매료시킨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은 돌집 예찬론자로서 수 년에 걸쳐 돌을 모아 다시 수년에 걸쳐 돌집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녀의 책에 보면 스트와트 딕이라는 이가 ‘잉글랜드의 시골집’이라는 책에서 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래된 시골집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시골집은 둘레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 일부가 되는 것에 만족한다. 오래된 시골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동그랗게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그 곳에 집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가 하면 토마스무서가 ‘좋은 농부가 되는 오백가지 방법’에서 충고하는 말도 인용되어 있다. “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돌을 들고 오라. 밭에돌이 많으면 그만큼 농사짓기 힘들다. 일꾼들도 손에 돌을 들고 집으로 오게 하라. 날마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길에 깔기에도 멋지고 벽을 쌓기에도 좋은 돌을 많이 갖게 되리라” 우리 부부 역시 집이 위치한 환경에서 가장 흔한 재료로 지어진 집이야말로 최상의 조건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 조금 더 넓은 평수의 돌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돌을 날라야 할 것 같다. 조선희/남군 표선면 토산리제236호(2000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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