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슬로시티 청산도에 가다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이 행정 지명인 청산도는 2007년에 슬로시티로 지정되며 ‘느림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섬이다.

지난 석가탄신일 연휴에 여고 동창생들 4명이 2박3일 일정으로 청산도 여행을 떠났다. 50세 넘도록 가정과 직장생활에 얽매여 친구들과의 여행기회가 좀처럼 쉽지 않았으나, 모처럼 의기투합이 이뤄졌다.

연휴 첫날, 들뜬 마음으로 제주항에 갔더니, 많은 제주도민들이 육지 여행을 하기 위해 울긋불긋 복장으로 배의 출발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전남 해남군 우수영에 도착한 뒤 처음 방문한 대흥사에는 때마침 석가탄신일을 맞아 신도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려 인파에 시달려야 했다. 곧바로 완도행 버스에 탑승하고 완도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더니,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내일 청산도 배를 타기 위해 주변에 숙소를 찾아 나섰으나 빈방이 없어 낭패를 맛봐야 했다. 터미널 주변의 허름한 여관방에도 빈 방이 없어 멀리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는 신지도의 민박집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이튿날, 완도터미널에는 청산도 배편을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청산도농협에서 운영하는 청산도행 배를 40여분 타고 마침내 청산도에 들어갔다. 청산도에는 이미 들어가는 사람, 나가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도로 주변에는 배를 타려는 자동차행렬이 길에 늘어섰다.

현지의 민박집 주인도 청산도 역사 사상 최고로 많은 인파가 자동차와 함께 찾아왔다고 고개를 저었다.

청산도 슬로시티 슬로길은 11개코스에 17개 길로 42.195km의 마라톤 코스 길이로 이뤄졌다. 우리는 4코스 종점이자 5코스 출발점인 권덕리 해안가에 숙소를 정하고, 청산도 명소인 범바위로 향했다.

5코스 진입로에 들어선 마을회관은 예전에 학교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많은 탐방객들이 마치 달팽이처럼 천천히, 구불구불 슬로시티를 걷기 시작했다.

범바위에 올라보니 화장실과 편의시설도 달팽이 모형이다. 범바위는 어미 범이 뒤따라오는 새끼 범을 돌아보는 형상으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옛적 한 주민이 권덕리 산고개 에서 바위를 향해 ‘어흥’하고 소리를 내니 바위 일대에 울림이 퍼지면서, 이곳에 사는 호랑이가 자기보다 무서운 짐승이 사는 것으로 판단해 급히 도망을 치면서 이후에는 청산도에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

범바위 주변의 4코스 해안길은 시계 없이 걷는 길로, 옛날부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해온 지역주민들이 도로가 없을 당시 짐을 운반하던 길이다. 몽돌해변에 드러누워 몽돌들이 파도에 쓸려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멀리 다랭이 논을 배경으로 어미 소와 새끼 소가 한가로이 풀을 띁어먹는 모습은 시계가 없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다.

다음날 청산도의 상징인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떠났다. 탐방에 나선 아주머니들과 함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노래를 함께 부르며 영화 ‘봄의 왈츠’ 촬영지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 

섬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의 2층 노란색 건물은 백설공주 동화의 일곱난장이 성을 연상하게 한다. 길가에는 다랭이논, 마늘밭, 보리밭 등이 그림처럼 펼쳐져 걷는 사람들에게 지루하지 않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짦은 일정이 아쉬워 슬로시티 도보여행은 도중에 포기하고, 드라이브를 시도했다. 바다에 펼쳐진 전복과 김, 다시마 양식장 모습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청산도의 돌은 맥반석이 많아 물맛이 좋고, 목욕을 해도 매끈매끈한 피부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모처럼 청산도에서 느림의 여유를 흠뻑 즐긴 친구들은 미처 못 걸은 길은 다음에 다시 걷기로 약속하며, 제주행 배편을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