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그때의 액수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요즘으로 환산하면 천원쯤은 되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그곳까지는 꽤 멀었는데 과자 값을 타러 그 곳까지 걸어갔으니…

별다른 놀이가 없던 시절, 나는 그 돈 몇 푼을 받고 와서 무엇을 했는지 확실치는 않다. 아마 눈깔사탕을 사서 다마(사탕)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여학생들은 사탕치기를 많이 했다. 사탕을 이빨로 깨물어 구멍이 크게 나오면 이기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는 풀떡 장사집이 있었다. 우리는 풀떡을 사서 호호 불며 친구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친구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솔잎을 걷으러 간다고 했다. 천지연 주위에는 소나무들이 많아서 아이들은 떨어진 솔잎들을 걷어다 불쏘시기로 쓴다고 했다. 호기심에 나도 한 번 가고 싶었지만 “집에 불쏘시기가 남아도는데 솔잎은 걷어다 뭣하겠느냐.”며 어머니에게 쓴 소리만 들었다.

중2때 1955년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한 일들이 많았고, 가고 싶어도 못 간곳이 한라산 정상이다. 지금도 겨울이면 눈 덮인 한라산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으로 다가선다.

십수 년 전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 갔을 때였다.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위대한 자연 앞에 말문을 잃었다. 햇살이 쏟아져 내린 산정호수는 하늘에서 짓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심연(深淵)은 경외(敬畏)였고 장엄이었다.

산봉우리들로 둘러쳐진 신비로운 호반은 고요함을 간직한 채 말없이 하늘을 품고 있었다. 전율로 눈가가 촉촉해왔다. 한라산 백록담도 못 본 내가 천지와의 만남은 특별한 감흥이었다. 신령스런 천지를 향해 합장을 하고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모든 게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해도 남는 것은 추억뿐이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가 부산으로 물건을 하러 갈 때도 가지 말았으면 했었다. 어느 날 먼 친척분이 아파서 우리 집에 왔을 때다. 그분은 젊은 여인네지만 집이 시골이라 병원에 다닐 동안 우리 집에 머물면서 밤에는 어머니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다른 방으로 가서 자라고 했을 때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 후 부터는 어머니 젖도 만지지 않게 되었고 혼자서도 잘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 연탄이 보급되기 전에는 아침마다 문밖에서 “낭 삽서!” 또는 “숯 삽서!”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때로는 “갈치 삽서!” “자리 삽서!”라는 소리도 노상 들으면서 살았다. 남정네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쪼개놓으면 아낙들은 그것을 등에 지고 마을로 내려와서 팔고 갔다. 시장이 형성되기 전이라 어촌의 아낙네도 옥돔이나 자리를 구덕에 넣고 다니며 팔았다. 옥돔과 갈치는 서너 마리씩 새끼줄에 꿰어서 한 꿰미에 얼마씩 하고 팔았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