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는 태어난 고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줄 곳 이곳에 눌러앉아 살면서 가는 사람 보내고, 오는 사람 반갑게 맞이하며 토박이로 살아간다.

나의 학창시절은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 고등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은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당시 서귀포에는 여학교가 없었다. 그때도 뜻있는 분들은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1950년도 후반기는 격변기라 그 시대상황은 서귀포에 여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마저도 희박했다.  

우리 집도 남자가 우선이었다. 오빠들은 서울로 가서 대학을 나왔지만 언니와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밀려났다. 몸이 약한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배움에는 아들딸 구별 없이 교육 시켜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셨기에, 나보다 일곱 살 위인 언니도 제주시로 가서 제주여고(2회)를 졸업했다. 오빠들 등록금 내기도 벅찬데 언니까지 고등학교를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니는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우연이었을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정방폭포 근처(서복 전시관)에 체육관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서귀여자 중고등학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누가 걸었는지 모르지만 여남은 명은 중학교 과정을, 중학교를 졸업한 여학생 7~8명은 고등학교 일학년 과정을 이수했다. 몇 안 되는 아이들이 제주시(그때는 성내라 했음)로 가서 여학교를 다니는 게 부러웠으나 우리 중에는 선배들 두세 명도 함께 수업을 받았다. 그중에는 성산포에서 온 아이도 있었고 서울서 온 아이도 있었다.

서울 아이는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삼 남매가 아버지 따라 서귀포로 와서 바로 이웃집에서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도 서귀포 초등학교 앞은 거의가 논밭이었다. 봄이면 보리들이 익어가고, 가을에는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인 채 가을걷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가고 올 때면 노상 지름길인 그 논둑을 지나다녔다. 무심코 내려다본 논둑의 풀밭에는 네잎클로버가 왜 그리도 많았던지. 그것들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던 시절이 아련한데…

쉬는 시간이면 선생님들과 탁구를 치며 일 년을 보냈으나 학교인가는 나오지 않고, 일학년 과정을 겨우 마쳤을까 해서 간판은 내려지고 말았다. 학교가 아닌 학원이었지만 그것마저 없어지자 학생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일부는 제주시로 가고 더러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마침 그때 남고 교감선생님인 강 선생님이 찾아 오셨다. “얘 너 우리학교로 와라, 네가 오면 오겠다는 아이들이 있으니 같이 공부하면 좋지 않겠니? 네가 오면 참 좋겠다.”라며 극구 종용(慫慂)하는 것이었다.

남주고 3회 졸업식 사진.

그나마 서귀포에 남주 고등학교가 있어서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3회)할 수가 있었다. 그 학교는 신설된 사립학교였고 남자학교라서 여학생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중앙로에 있는 지금의 ‘은하목욕탕’ 자리에 학교가 있었는데 겨우 일, 이, 삼학년이 수업할 수 있게 교실도 세 개 뿐이었다. 여학교를 선호했던 나는 결국 남녀 공학을 나오게 되었지만, 그때 여학교인가만 나왔어도 서귀포여고 1회 졸업생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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