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쓰는 제주의 삶]
오금자 / 수필가

동쪽 하늘이 차츰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수평선 위로 둥근 해가 얼굴을 내밀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어둠을 걷어내는 태양이 바다와 산, 사람들의 마음을 깨운다.

일출은 어제와 오늘을 가르는 선명한 선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햇살은 더욱 강렬하다. 일출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려는 듯이 붉게 타오른다. 누구라도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환호성을 지르게 한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시간과 공간을 멈춘 듯이 붉은빛은 서서히 바다를 삼키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을 꿈꾸게 하고 살아가는 힘을 얻게 하는 곳이다.

새벽 정적을 깨는 파도 소리가 우주의 심장 소리처럼 들린다. 바다는 태초의 숨결로 이어지고, 새벽빛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드넓은 바다를 보고 있으면 삶의 고뇌는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이 자라난다.

성산일출봉은 말 그대로 해돋이 덕분에 유명하고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멀리서 바라보면 분화구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봉우리가 참으로 섬세하다. 일출봉을 오르다 보면 비쭉 튀어나온 칼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아래 벤치에 앉아 우도를 오가는 유람선이 파란 바다를 가로지르며 그려내는 하얀 물길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해 뜨는 성산일출봉

일출봉의 오른쪽에는 우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고, 왼쪽에는 섭지코지와 신양 해수욕장이 절경을 뽐내고 있다.

일출봉은 마치 거대한 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성산(城山)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이 으뜸이라 하여 성산일출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출봉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국내 최초의 세계자연유산이다.

오랫동안 성산일출봉은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말까지 국내 신혼여행지 1위로 꼽히며 허니문 성지로 불렸다. 신혼의 아침은 제주도의 푸른 바다처럼 생기발랄했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새롭던 시절, 창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 한줄기까지도 신혼부부를 축복해 준다. 밤이면 별이 반짝이는 창가에 앉아 미래를 그렸다.

일출봉 정상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던 부부들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처음 먹은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지팡이를 짚은 노인 부부가 현무암 돌담길을 걸어간다. 제주의 바람은 여전히 신혼의 달콤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신혼 때나 지금이나 그 빛깔은 다르지 않지만, 빛 속에 스민 삶의 무게를 읽어 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두려움이 없던 시절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이제는 서로의 주름살 속에 새겨진 사연들을 함께 나누며 걸어가고 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인생

태양이 붉게 타오른다고 반드시 밝은 날이 아니듯이, 인생을 산다는 것도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날에는 공격수가 되어 운동장을 뛰어다니다 중년을 넘어 노년이 되면 노련한 수비수가 된다.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밤새 고향을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태양은 오늘도 잘 견뎌내라는 듯 위로의 빛을 드리운다. 빛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며, 고향 떠난 사람들 마음을 비추어주는 등대가 되어준다.

파도가 읊조리는 노래는 고향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바닷가에 서서 망향가를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성산포의 바다는 몸과 마음을 다 드러내고 밀물과 썰물이 되어 출렁인다.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바닷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시인은 성산포에만 오면 취한다고 했다. 이생진 시인은 유명한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성산포를 이렇게 노래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취하는 건 사람이다.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림자도 없고 색도 없는 완전한 빛 속에서는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삶에서도 고난이 없으면 무미건조한 삶이 되듯이 빛과 어둠은 우리의 양손처럼 서로가 균형을 잡으며 시간을 건너왔다. 고통을 외면하는 자는 기쁨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태양은 구름 뒤에서야 비로소 빛나고, 어둠도 달빛 아래서는 별처럼 반짝일 때도 있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는 성산일출봉

붉은빛으로 물든 바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하나인 듯 너울 속에 흩어진다. 삶은 죽음 없이 정의될 수 없듯이 새로운 생명의 태어나면 다른 생명은 늙어 죽어간다. 끝없는 재생 속에서 영원은 허상이 되고, 순간은 지금 바라보는 태양이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토대가 됨을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나와 작별하고 먼 길을 떠났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작별을 두려워한다. 삶은 봄날의 꽃처럼 아름답고 치열하지만, 그 뿌리에는 이별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영원한 작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인연과 사랑의 끈이다. 바람 소리, 빗방울 소리, 심지어 새소리에도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조용히 뒤돌아본다.

성산 앞바다에는 인생이라는 배가 미지의 세계를 넘보고 있다. 삶에서 떠난 길을 되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는 시간을 거슬러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일출봉 해안가에는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파도 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스며있고 또 누군가의 얼굴이 물빛에 출렁댄다.

성산일출봉 여기저기에 남기고 간 흔적들은 파도에 떠밀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침묵보다 짙은 노을은 하루를 마감하고 저물어 간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출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걸으며 온종일 지친 몸으로 떠돌다가 노을 앞에서 시린 이마를 드러낸다. 또 하루가 가고 등이 휜 누군가의 생애도 시들어 갈 것이다.

마지막 검붉은 노을은 바다로 침몰해 가면서 성산포의 신비스러운 밤바다를 물들인다. 석양에 비친 파도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하게 출렁이며 아름다운 색감을 연출하며 반짝거린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쓸쓸함을 저 바다에 던져버리고 이제 밝아오는 해를 맞이하리라.

오늘도 성산일출봉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태양이 붉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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