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추억과 낭만, 그리운 솔동산(상)

솔동산길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서귀포의 명동이라고 불릴 만큼 번화가 였다. 하지만 그 이후 도시정비와 신도시 건설 등의 영향으로 쇠퇴하면서 옛 모습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이에 따라 서귀포신문은 2회에 걸쳐 시민과 지역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옛 도심이었던 솔동산길의 흔적을 더듬고 옛 문화가치의 중요성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 소나무 동산? 솔대 동산?="그때가 좋았지" 김계담(70) 전 서귀포문화원장이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는 솔동산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던 그 장소, 그 때를 어찌 잊으리랴.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귀포의 명동이라고 불릴 만큼 상권의 중심지였어요. 그 당시에는 서귀읍사무소, 우체국, 경찰서, 서귀여중이 있었고 좁은 골목길 양 옆으로 빼곡히 상가들이 밀집해 있었죠. 사람들이 북적였죠. 저녁 때 일이 끝나면 바로 솔동산으로 가 친구들과 만나 막걸리 한잔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라고 말하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 도로확장 정비 공사를 하기 전 솔동산 입구 모습<사진제공=사진가 강병수(라이카사 사진관)>

이처럼 솔동산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서귀포의 명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화가였다. 솔동산은 현 서귀포시 송산동의 옛 지명이자, 서귀포초등학교 북서쪽에 있는 동산을 말한다. 예전 이 곳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촌락을 이뤄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로 기록되고 있다.

솔동산이란 명칭은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곳에 활쏘기를 하던 과녁인 솔대가 있어서 솔대동산이라 불리던 것이 솔동산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도 한다. 1981년 서귀읍에서 서귀포시로 승격하면서 송산동으로 한문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일본인들, 서귀포항 주변에 고래공장 등 운영= 과거 솔동산의 모습은 어땠을까. 지난 2000년 서귀포신문 객원논설위원이었던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논단을 통해 솔동산의 모습을 이같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해방전, 서귀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어촌으로서 주민들 대부분이 자급자족의 경제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서귀포항을 비롯한 지금의 송산동 일대에 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살았는데 면사무소.주재소.소방서 등의 관공서와 학교가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서귀포항 주변에 거주하면서 고래공장.해산물 공장 등을 운영하고 과수원을 경작하거나 표고버섯을 재배해 상대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다. 지금은 솔동산길 양쪽으로 잡화점.양복점.철물상.제재소.약방.식당.목욕탕 등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목욕료는 5전이었는데 당시에는 50전으로 2~3명이 술을 마실수 있었다.

▲ 1960년대 항공촬영사진. 서귀포항과 솔동산 일대에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사진제공= 사진가 강병수(라이카사 사진관)>

해방후 솔동산의 상점들은 대부분 한국인에 의해 운영됐는데 잡화.고무신.포목.철물.목재.양복.책.빵.과질.포목.우산.석유.기름.육고기.술 등을 팔았다. 대부분 상점들은 상호도 간판도 없이 누구네 점방으로 불려졌으며, 비슷한 규모에 생계를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같은 업종에는 대개 하나의 상점이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중반 이후 도시정비와 신도시 개발 등으로 공동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의 중정로가 생겨나고 관청들이 이전하면서 상점들도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뒷병디라 해 무덤과 잡초만 무성하던 자리에 시장이 생겨나고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상권의 중심이 솔동산에서 중정로 일대로 이동하게 됐다. <다음주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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