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일가 몰락과 조선 천주교 탄압 몰고온 <황사영 백서>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의 묘.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성지로 조성했다.

마늘 수확이 끝난 대정의 들녘은 모처럼만에 한산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사람으로 가득 찼는데,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사람 구경 하기도 힘들다. 대신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이 목가적 정취를 전할 뿐이다.

최근에는 마늘과 양파 농사로, 고기잡이로 이 일대 사람들의 삶이 꽤나 넉넉해졌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악명을 떨쳤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수해에 노출되고, 비가 조금 덜 내리면 가뭄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연중 바람이 심하게 불어 일상에도 어려움이 컸다. 이런 악조건 때문에 조선시대 대정현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객들이 유배된 고장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슬포를 바람이 많이 불어 ‘못살포’라고, 유배객들이 많이 와서 살기 어렵다고 ‘못살포’라 불렀다.

조선시대 대정에 유배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정난주는 아마도 가장 일찍 제주땅을 밟은 천주교인일 것이다. 정난주는 천주교 탄압의 결정판이던 신유박해 당시 남편을 잃고 친정이 몰락하는 아픔을 겪은 후, 대정으로 유배돼 관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가 제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신의 도움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는 방식으로 아들에게 새 삶을 선사했다.

정난주는 1773년(영조 49)에 아버지 정약현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약현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다. 정약종·정약전·정약용 등은 그의 숙부들이다.

정난주는 둘째 작은아버지인 정약전에게 글을 배웠고, 장성한 뒤에는 고모부인 이승훈한테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도가 됐다. 남편 황사영과 결혼해 아들 황경한을 낳았다. 남편 황사영(黃嗣永)은 강화도 출신으로 정약종에게 학문을 배우고 1790년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정난주는 숙부의 제자이자 당대 엘리트인 황사영과 결혼하며 행복한 미래를 기약했다. 황사영은 처숙이자 스승인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해 신앙적으로도 아내와 동반자가 됐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황사영이 과거에 급제한 이듬해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전라도 양반이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고 천주교 예법으로 상을 치렀다가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사형을 당한 것. 이후 천주교인들은 끊임없이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개방적이고 학문적으로 관대했던 정조 대왕이 집권하던 시기다. 천주교인들에게 화가 더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결국 황사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공직 진출을 포기하고 천주교 전파에 전념했다. 1795년에 주문모신부를 만나고 경기도 고양에서 서울의 아현동으로 이사해 더욱 열심히 포교활동을 펼쳤다.

신해박해가 일어난 지 10년 후 다시 신유박해가 터졌다. 정조 대왕이 죽고 어린 왕 순조가 등극하자 왕을 대신해 섭정에 오른 정순대비가 천주교를 사교로 여겨 금지령을 내린 것. 정약용 형제들에게 화가 미쳤다.

정약용의 큰형이자 정난주의 아버지인 정약현은 시종일관 천주교를 부정해 마재에서 고향을 지켰지만, 정약종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천주교를 버릴 수 없다고 버텼다. 정약종은 결국 아들 정하상과 더불어 형장에서 사형을 당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려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1801년 3월에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현으로 유배에 처해졌다.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간난아들을 데리고 친정 남양주의 마재로 피신했다.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 배론 골짜기로 피신했다. 배론의 땅굴 속에 돌로 벽을 쌓고 입구에는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굴로 위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선천주교의 비참한 실상과 천주교의 재건책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가로 62cm 세로 40cm 되는 명주천에 1만 3천 311자나 되는 한자로 적은 이 <황사영 백서>는 이후 천주교에 대한 모진 탄압과 정약용 일가 멸문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의 배론 골짜기로 피신했다. 토굴에 몸을 숨긴 채 북경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를 복원시킬 방안을 적은 장문의 편지를 작성했다. 사진의 왼쪽이 황사영이 몸울 숨겼던 토굴이고, 오른쪽이 <황사영 백서>다. 황사영 백서는 로마교황청이 보관하고 있다.

‘죄인 도마 등은 눈물로 본주교 대야 각하께 호소합니다. …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가 엎여질 위험에 있고, 생민이 빠져 죽는 고통에 걸려, 자애로운 아버지는 없어져 붙들고 부르짖을 길이 없고 어진 형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상의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 군사 5,6만 명과 중국 선비 서너 명을 서양의 군함 수백 척에 태워 대포 등을 싣고 서해안에 이르러 교황의 명으로 조선을 강압하여 조선에서의 신앙과 포교의 자유를 보장토록 하여주시옵소서.’

황사영은 이 서신을 옥천희에게 시켜 동지사 일행 편에 섞여 베이징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도중에 발각돼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그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국인에게 조선을 침략해 줄 것을 요구한 대목에서 조정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해졌다.

한편, 황사영의 편지는 의금부에서 압수해 보관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담당 관리가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 판단해 천주교인 이건영에게 넘겨줬고 이건영은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했다. 현재는 로마교황청에 보관하고 있다.

조정은 이 일로 황사영의 가산은 몰수하고 그의 집을 헐어 연못을 만들어버렸다. 다시는 이곳에서 역모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시어머니 이윤혜와 숙부 황석필은 노비가 되어 각각 거제도와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됐다. 정난주도 어린 아들과 함께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어린 아이를 안고 먼 유배길에 오른 정난주는 제주에서 어린 아기에게 닥칠 운명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역모자의 씨를 공서세력(서학을 공격하는 세력)이 가만 놔둘 리 없기 때문이다.<계속>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