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불바다'를 준비했던 결7호, 송악산 곳곳에 생채기 남겨

송악산은 독특하고 뛰어난 비경 때문에 예로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새 한마리가 절벽 위에서 제주 서남부 절경을 감상하고 있다.

송악산은 주변의 산방산·용머리·형제섬·가파도·마라도 등과 더불어 독특한 해안절경을 연출한다. 그래서 과거 제주를 방문했던 선비들도 이곳을 빠뜨리지 않고 방문했고, 그 감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청음 김상헌은 1601년 제주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순무어사의 명을 받고 제주에 부임했다. 김상헌은 1601년 8월 어사에 명을 받으면서부터 이듬해 2월 상경할 때까지 일기를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이 <남사록>(南傞錄)이다. 그가 송악산을 구경한 후 느낀 소회를 남긴 기록이다.

'하인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바다 갈매기가 암벽의 중간에 와서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그때의 목사가 그 병아리를 잡으려고 큰 새끼줄에다가 한 사람을 매달리게 하여 내려뜨렸습니다. 끌어당기려고 할 때에 갑자기 새끼줄이 끊어져, 그 사람은 뼈가 부서져 바다에 가라앉았는데,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 모릅니다"한다. 무부(武夫)의 방종한 욕심이 거리낌이 없어서 사람의 목숨을 장난하며 가지고 노는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이런 따위가 많다.'

훗날,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은 척화의 중심에 서서 청나라에게 굴욕하기를 거부하는 장면은 영화 ‘남한산성’에 긴장감 있게 표현됐다. 제주의 유림들은 그가 어사로 부임하는 동안 민폐를 크게 시정한 점과 존명반청의 입장을 굳건히 지킨 점을 받들어, 5현에 포함시켜 귤림서원에 배향했다.

청음이 일찍이 이곳에서 무사들의 방종을 경계했는데, 훗날 일본군국주의 세력은 송악산 일대에 치유될 수 없는 생체기를 남겼다. 2차 대전 말기에 패색이 짙어진 일본 군부가 제주를 최후의 결전지역으로 선택하면서 불거진 일이다.

1941년에 일제가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4년에 이르러서는 연합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잠수함과 공습기가 일본 본토 가까이 접근하면서 일본군을 위협했고, 1944년 7월에는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됐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군부는 연합군과의 종전협상에서 천황제 유지와 일본 본토 사수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려는 길목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려 했다.

1945년 2월에 이르자, 일본의 방위총사령관은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최후의 결전 내용을 담은 암호명 '결전작전'을 하달했다. 이 작전은 1945년 6월경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총 7호로 구분되었다.

그 중 '결1호 작전'은 홋카이도(北海道)를, 지시마(天道) 방면을, '결2호 작전'은 토후쿠(東北) 일본방면을, '결3호 작전'은 간토(關東) 방면을, '결4호 작전'은 토카이(東海) 방면을, '결5호 작전'은 츄부(中部) 일본 방면을, '결6호 작전'은 규슈(九州) 방면을, '결7호 작전'은 제주도 방면을 대상으로 삼았다.

송악산 해안 절벽에 일제가 파놓은 진지동굴이 줄지어 있다. 최근에 지반이 붕괴되면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10년 전 진지동굴 안쪽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동굴의 단면은 거의 정사각형 모양이고, 깊이는 10m 내외에 이른다.
동쪽 등반로 도중에서 작은 진지동굴이 있다.

일본군은 1945년 2월에서 3월 사이 펼친 유황도 전투에서 패해 미군에 섬이 함락됐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1945년 3월 일본최고전쟁지도자회의인 ‘대본영’은 결호작전 중에서 결1호와 결7호를 중점을 두고 다뤘다. 미군의 상륙이 제주도나 홋카이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결7호 작전' 준비요강이 한반도를 관할하던 일본군 제17방면군에게 하달되었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이르자, '결7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군이 죽음의 임무를 띠고 제주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45년 1월에 1000여 명에 불과했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 병력이 4월이 되자 3만6000여 명으로 늘었다. 제17방면군은 제주도 전역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주도로 들어왔던 일본군 부대는 '제58군'이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1945년 4월 23일 일본군 제17방면군과 제58사령부 사이에 제주도민의 조선 본토로의 이주에 대한 협의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군부는 제주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드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차 병력집결에도 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일본 군부는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21사단을 제주에 추가로 배치했다. 제121사단은 병력 1만4700명 규모에 기관포와 로켓포 등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그 와중에 6월 25일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됐다. 미군의 제주도 공략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조선 본토에 있는 일본군 부대들을 추가로 제주도로 불러들였다. 종전 시까지 일본인 7만5천여 병력이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도내 전역에 배치돼 요새구축과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비행장 건설·군용도로 건설·토지 강제수용·강제징용·강제노무동원· 식량 및 보급품 공출·주민 전투대세 구축·주민 통제 등을 통해 제주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결전을 위해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는 위장진지(21)·전진거점(18)·주저항진지(54)·복곽진지(11) 등 4종류 총 104개소였다.

송악산이 포함된 제주 서남부는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제1저지선이자 주된 결전장소로 설정됐다.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에 설치됐던 주저항진지 54개소 가운데 22개소를 제주 서남부에 집중 배치했다. 주저항진지가 방어작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서남부에 배치됐던 주저항진지는 안덕면 동광리·사계리·창천리·한경면 조수리·고산리·저지리 등지에 고루 배치됐다.

당시 일본군은 주저항진지 22개소 외에도 서남부에 전진거점 5개소, 위장진지 2개소, 복곽진지 5개소 등을 배치했다. 송악산 진지는 서남부 전진거점 5개소 가운데 한 곳이다. 전진거점은 주저항진지 앞에 배치돼 적이 주저항진지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작전을 실행한다.

송악산 인근에는 진지동굴 총 15개가 남아 있는데, 송악산 전진거점에 속해 미군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어뢰와 폭탄을 실은 소형보트를 숨기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한편, 일제는 결7호 작전 준비 말기인 1945년 6월에 한국 전역에 면장을 책임자로 내세워 국민의용대를 조직했다. 징용보다 간단하게 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체제였다. 일제는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민들의 노동력은 물론이고, 가축이나 토지 등 주민들의 모든 것을 강제로 차출했다.

주민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굶주림과 일제의 매질에 견디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지금은 출입이 통제됐지만 과거에 지난 2007년에 답사했을 때 해안가 진지동굴 입구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높이 2.5m정도에 깊이가 9~10m 정도 되는 듯했다. 이런 진지동굴은 송악산에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주도 오름과 해안 100개소에 각종 요새들이 구축됐는데, 현재 발견된 진지동굴이 700여 개에 이른다.

송악산 진지동굴은 최근 지반이 약해져 일부 붕괴되면서 서귀포시청이 이 일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다만, 송악산 등반로 동쪽에 작은 진지동굴이 있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치밀한 준비에도 제주도에서의 최후의 일전은 치러지지 않았다. 전쟁은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라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종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섬이 전쟁의 불바다가 될 위기를 넘겼으니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일제가 제주도 전역을 요새로 만드는 와중에 주민들의 가슴과 제주도 천혜의 환경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청음이 경계했던 '무사들의 방종'이 빚은 아픔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