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1991, 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1991년 4월 26일에 명지대생 새내기 강경대씨부터 5월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씨까지 11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권력에 맞서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과,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죽음을 둘러싼 정권의 잔인성도 그렸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와 전노협에 대한 무차별 체포와 구금, 수서 택지분양 비리 등이 상징하듯 억압과 부패가 일상화된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청년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저항은 그들의 삶이었다.

1991년의 항쟁은 87년 6월항쟁을 닮은 듯해도 실상은 한국사회가 절망의 터널로 들어서는 입구라는 데서 6월항쟁과는 크게 다르다.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 등 한국의 정치를 분점하던 정객들이 1990년에 야합하며 보수대연합체를 형성할 때, 나락은 이미 예견됐던 상황. 그들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짓밟고 자본과 동맹을 맺고 한국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불태웠다.

그 터널의 입구에서 사회를 밝힐 한 줄기 촛불이 되고자 했던 청춘들을 그렇게 저항하다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김지하와 조선일보는 '죽움의 굿판을 멈춰라'는 시로 청년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청년들이 죽어 가는데, 권력을 꾸짖어야할 문인과 언론은 오히려 학생들을 겨냥했다. 사회는 '꼰대'들이 기획한 대로 그렇게 형성됐다.

영화가 미처 그리지 못한 죽음이 1991년에 또 있었다. 제주도개발특별법에 반대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지핀 양용찬 열사의 죽음이다. 정권은 주민들이 수 천 년 동안 삶의 터전으로 지켜왔던 땅을 수탈하겠다는 자본의 야욕을 행동으로 집행했다.

도민들과 청년 학생들이 이를 막기 위해 거리에서 싸웠지만 경찰의 물리력과 맞서기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양용찬 열사는 그 악법을 온몸으로 막아보겠다며 스스로 산화했다. 지역의 문제로 인식되던 특별법이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됐고, 외지에 살던 제주향우회원들마저도 투사로 만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양용찬 열사의 분신에도 불구하도 국회는 그 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제주도는 이후 개발광풍의 지옥이 됐다.

개발은 제주도의 장밋빛 구호가 됐고 제주도는 권력과 자본의 수탈 대상이 됐다. 국내외 거대자본은 제주신화월드와 예래동 휴양형주거단지, 서귀포시헬스케어타운, 송악산 뉴오션 타운 등에서 보이듯 제주 전역을 파헤치고 있다. 도민들은 부동산 가격 폭등과 환경파괴로 고통에 내몰렸고 개발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91년 후 제주도도 그렇게 어두운 터널에 갇혔다.

그리고 정권은 ‘개발과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강정바다에 해군기지를, 성산읍에 제2공항을 추진했다. 해군기지에는 크루즈 항을, 제2공항에는 관광객 수용을 각각 명문으로 내세웠다. 개발이 희생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시대, 양용찬 열사가 부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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