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 환상숲곶자왈공원 대표, ‘숲스러운 사이’ 저자
환상숲곶자왈공원은 원래 농촌교육농장에서 시작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와 숲속을 걷고, 작은 화분을 심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던 체험농장이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가 닥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빼곡했던 학교 단체 수업은 취소됐고 5인 이상 집합금지가 내려졌을 때 결국 숲은 텅 빈 곳이 되었다.
손님들은 오지 않는데 매달 지급해야 할 월급과 운영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시기는 지금 생각해봐도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우연히 ‘유니크베뉴(Unique Venue)’지원 제도를 알게 되었다.
기존 전문 회의 시설을 벗어나 제주만의 매력과 지역적 특색을 갖춘 회의 장소로 선정되면 행사 참가자의 비용을 일부 지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대규모 학회들이 취소되고 줌 회의를 하기 시작할 때라, 곶자왈 숲속 야외에서의 회의 공간 대여는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숲이 아이들만의 배움터에 머무르지 않고, 기업과 단체가 모여 생각을 나누는 장소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화분을 심던 체험장이 어느 날은 회의장이 되었고, 또 어느 날은 음악회 무대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 찾은 새로운 길은 전화위복이 되었고, 곶자왈 숲이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품는 장소로 변모할 수 있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리니 5년 전 처음 유니크베뉴 공간으로 꾸리기 위해 테이블보를 깔면서도 손님들이 찾아올까 걱정하던 그 가을이 생각났다. 5년 후에는 수학여행 단체팀보다 기업 연수팀이 예약 시간표를 더 많이 차지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하던 때의 일이다.
며칠 전에도 퇴직을 앞두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공무원들이 인생 이모작 연수로 숲에 다녀갔다.
평생 직장을 떠날 생각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숲에 들어선다. 하지만 숲에서 사색하고 버려졌던 돌땅이 아름다운 숲이 되기까지의 강의를 듣고 자생식물을 활용한 족욕 테라피까지 하고 나니 표정이 달라졌다.
참가자들 사이 처음 마주할 때 느껴지던 무거운 기운이 숲속의 공기와 어울리며 차츰 가벼워지는 것을 볼 때면, 자연과 숲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 주는 쉼터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그 날은 며칠 전 비가 와서 그런지 노랗게 익기 전인데도 무환자나무 열매가 초록빛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예로부터 근심을 없애주는 나무라 하여 열매 안의 씨앗을 가지고 염주나 묵주를 만들 때 쓴다고 하니 몇몇 연수 참가자들이 슬며시 열매를 주워들고 소중한 듯 손에 감싸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연수 참가자 중 한두 명에게 선물로 주면 좋겠다 싶어 나 또한 씨앗을 주워 장신구를 만들어 보려 했다.
그런데 드릴로 구멍을 뚫었더니 초록의 씨앗이 쉽게 으스러져 버렸다.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한 탓이었다. 며칠 후 그때 함께 주워 두었던 무환자나무 열매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벌어져 있었다. 그 안의 씨앗은 까맣게 반질반질해 단단한 나무같이 제법 묵주에 쓰는 그 모양과 비슷했다.
억지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시간이 씨앗을 단단히 빚어낸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근심과 걱정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서둘러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지만, 조용히 놓아두면 시간이 흘러 어느새 단단히 여물어 있듯, 걱정 또한 어느 순간 해결의 길을 찾아가게 된다. 무환자 씨앗처럼 말이다.
나는 오늘도 숲에서 배운다. 모든 것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시간을 믿고 기다리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