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선 / 북칼럼니스트, 에세이스트

가을과 나무의 나이테, 그리고 한라산. 모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상징이다. 흐르는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여 삶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깨닫게 하며 우리 각자의 삶에도 곱고 단단한 나이테를 새겨가라 조용히 속삭인다.

가을만큼 우리를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계절도 드물 것이다. 산과 들을 붉고 노랗게 물들인 잎사귀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난 시간을 곱씹으며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나무는 해마다 겹겹이 나이테를 쌓아가며 자신의 역사를 말없이 기록한다. 나이테 자체가 존재의 흔적이자 단단한 증거인 것처럼 나무의 나이테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에 쌓인 시간의 흔적들 속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낸다.

이처럼 삶의 깊이가 더해가고 사색의 계절에 마음에 품는 이야기와 감정도 깊어지듯 제주를 배경으로 한라산의 거목이 새긴 나이테큼이나 한 그루의 나무처럼 고희에 접어든 70여년의 삶을 써 내려간 시집 한 권을 만났다.

가을의 정취와 가장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이영균 시인의 첫 시집 한라산에 기대어이다.

책은 1깊은 숲속을 걷고 있다’, 2이 길을 걸어왔다’, 3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4두고 두고 미안한 사람’, 5한라산 집으로 돌아간다의 구성으로 136여편의 시와 시인의 아들이 찍은 사진이 실려있는 감정적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다.

한라산 높은 언덕 소떼들 한가롭고 / 가을 바람에 은빛파도 / 바다에 가을 가을 / 나비 억새꽃 언덕에는 가을이 익어간다 / 가을햇살/ 바위 틈새 비좁은데 / 털머위 샛노랑꽃 틈새마다 피어나고 / 노을은 들판에서 가을 그림자 짙게 드리운다 / 한여름 햇살 뜨거움은 가을을 준비하는 교향곡인 양 / 걸음마다 가을바람 감미로운 가을 풍경

P-118 가을 풍경 중에서

짧지만 높은 밀도로 가을 풍경과 한라산의 모습을 글자 하나하나에 생생히 담아낸 시로, 자연과 삶이 하나 되어 만드는 풍요와 평화를 노래하는 듯 하다. 흩날리는 낙엽과 깃든 햇살과 들판, 들꽃의 자태가 시 안에 살아 숨 쉬며, 읽는 이에게 따뜻한 위로와 고요히 사색을 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어린 사내가 늙은 사내가 되었다 / 어린 사내는 배가 고팠고 / 청년은 민주화와 산업화 중간에서 혼란스러웠고 / 장년은 중화학과 전자소재 중간에서 갈등하였고 / 늙은 사내는 문명과 자연 중간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혼란과 갈등의 시간들 훌훌 털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 한 사내의 생을 들여다보면 한 나라의 압축된 현대사가 녹아있다 / (중략) 늙은 사내가 한라산 중턱에서 그리움 찾아 밤하늘 쳐다본다

P-215~216 내 삶의 궤적 중에서

산업화 시대를 살아내며 겪은 삶의 고난과 아픔, 그 모든 세월의 시간을 뒤로하고 제주 한라산 자락에 기대어 평안을 찾은 시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도 고요한 울림을 전한다.

시집의 제목처럼 제주도 한라산은 그에게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삶의 쉼터이자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10년간 한라산 자락에서 기대어 쌓아 올린 삶의 나이테처럼, 단단하고 깊이감이 있어 촘촘한 삶의 이야기와 그 위에 피어난 고요한 자연의 풍경이 어우러져 고된 세월을 견뎌낸 자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듯 하다.

가을 끝자락에 선 오늘, 마음 깊이 스미는 가을바람과 함께 마음속 나이테를 바라보며 지나온 길을 고요히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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